스카우트

2022. 6. 19.매복사랑니

지각 >///<

네이버 웹툰 전자오락수호대 완결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모르시면 안 읽어도 돼요~

하지만 이건 안 읽어도 전자오락수호대는 봐주세요 사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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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떼었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기껏 대접해준 것을 입에 가져가지도 않은 채 손깍지를 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인가.”

아니카 역시 차려두기만 한 잔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긴 마찬가지였다. 크레인의 개별 만남 요청을 수락하며 대화를 간단하게 끝내고 싶어 집으로 초대한 입장이었지만, 그리 달갑진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귀한 분이 뭐 하러 이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방해하신대요?”

그 말대로 바깥에선 마을 복구 사업이 한창이었다. 약초밭이 엉망이 되었다느니, 상점 건물은 처음부터 새로 지어야겠다느니 하는 대화 속에서는 전과 달리 수호대 직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오랫동안 고전게임부서를 등한시했던 수호대가 하루아침에 이들과 함께하려니 제법 웃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수호대의 모든 이념과 직원 개개인의 것이 완전히 같지는 않는 법. 반면에 크레인은 복구를 도와주긴커녕 방해하러 온 게 맞는 셈이라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잔 속의 녹지 않는 얼음만 달그락거렸다.

“원하는 대로 짧게 말하지. 자네를 수호대 신설 부서에 스카우트하고 싶네.”

“어머~ 이거 낙하산 아닌가?”

차별 없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공개된 인사로 유명한 크레인의 제안에 놀랄 법도 했지만, 아니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전설’로 다시 자리매김한 용검전설의 NPC라고 해도 크레인이 직접 찾아올 이유는 몇 가지로밖에 좁혀지지 않는다. 설마 하긴 했어도 조금은 예상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크레인은 대답 대신 가져온 서류를 펼쳤다. 이전에 패치와 치트가 각자 고전게임부서와 용검전설에 대해 올린 보고서였다. 치트가 작성한 서류에는 검은 칠이 많아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크레인은 이제 극비 문서로 넘어가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검은 금요일’ 이후 촌장과, 아버지와, 많은 것들을 잃은 약초마을의 새 촌장이 어떻게 용검전설과 약초마을을 지켜냈는지는 읽을 수 있었다.

“자네는 ‘검은 금요일’ 이전에는 정식 대원이 될 예정이었지. 당시 해직된 이들을 복귀시키는 건 당연한 수순일세.”

아니카는 해직된 대원이 아니라 자진 퇴사였지만 크레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 절차상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인사팀장이 모든 이에게 직접 찾아올 리도 없었다. 아니카가 입을 떼기도 전에 크레인은 다른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를 뒤덮었다.

“신설 부서의 초안이네. 공개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왔지. 이제 주인공님들은 ‘리얼함’을 원하네. 시뮬레이션과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달라.”

서류에는 ‘레일 월드’, ‘씽즈’, ‘에일리언 숨바꼭질’ 등 수호대가 복구 사업이 정리되면 오픈하겠다고 발표한 게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인공님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된 완벽한 게임이 아닌, 주인공님과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세계. 자유로운 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예측 불허의 게임. 주인공님들은 이제 이런 게임을 원한다고 했다. 신설 부서의 이름 후보에는 ‘신 시뮬레이션 부서’, ‘리얼 월드 부서’, 그리고…… ‘인공지능 부서’.

“여기서 있던 일은 함구할게요.”

아니카는 팔랑팔랑 넘기던 서류를 테이블에 탁탁 내리쳐 정리했다. 수호대에 합격했던 아니카는 분명히 이 제안을 수락했을 것이다. 자신이 잘하고 즐길 수 있는 분야일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검은 하늘 아래에서 소꿉친구에게 등을 돌린 채 눈물 흘리던 소녀는 그 시절에 남겨두고 왔다. 힘만 센 바보에게 약속해달라 다그치던 아이는 새로운 촌장을 배웅했다.

“그리고~ 제가 약초마을 촌장 짬밥이 있는데 어지간한 직위는 사절이거든요. 신설 부서 팀장이면 승낙할게요?”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당돌한 제안에 크레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카라면 대리부터 시작할 수 있고, 틀림없이 패치와 비슷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고속 승진 기록을 세울 만한 인재다. 그러나 아니카가 요구한 조건은 크레인의 선을 넘는 일이었다.

“비밀을 지켜 준다니 고맙군. 그럼 그만 방해하고 이만 가보도록 하지. 실례 많았네.”

두 사람은 처음 대면했지만, 서로를 잘 알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있더라도 본인의 의사가 확고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카의 단호한 거절에 크레인은 미련 갖지 않고 일어섰다.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찻잔을 앞에 두고 차를 잘 마셨다는 인사도 덧붙였다.

아니카는 불청객을 현관까지만 배웅하고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뒤늦게 식은 차를 들이켜며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약초마을은 여전히 약초마을이었다. 수호대에 합격하고 발령 결과에 따라 떠날 수도 있던 곳이었다. 그래도 큰 유감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젠 용검전설이, 마을 주민들이, 퍼블리가, 그리고 아니카 자신이 아니카를 이곳에 있게 했다.

“더 바빠지겠네~”

혼잣말을 하는 아니카의 머릿속에선 많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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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월드나 심즈같이 알아서 굴러가는 세계관 게임을 좋아해서 ^///^)> 아니카가 찰딱일 것 같았어요!

크레인이 수락할 리 없는 제안으로 돌려서 거절하는 아니카와 거절 의사를 한방에 알아듣는 크레인이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