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의 바다 01

2022. 5. 4.매복사랑니

한차례 학생의 물결이 쓸고 지나간 커다란 문 앞에 마차가 멈추어 선다. 문지기는 입학식이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고풍스러운 창살 문을 닫던 참이다. 하지만 시간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문지기는 마차의 문장을 확인한 뒤, 어떤 번거로운 절차도 없이 문을 도로 활짝 연다. 잠시 뜸해진 말발굽 소리가 다시 일정한 속도로 울린다.

“뭐야, 그냥 열어주네…….”

검은 머리카락으로 눈가를 살짝 가린 소년이 마차 안에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문지기가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라며 막아서길 바란 모양이다. 늦잠 자는 척을 하고, 두고 온 짐이 있다며 저택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오고, 멀미한다며 말을 느리게 몰아달라고 했지만, 완벽히 소용없었다. 입학생 대표가 아니니 입학식에 늦게 입장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 기숙사 확인을 늦게 해도 크게 꾸중 듣진 않을 게 뻔하다. 소년은 그 모든 특혜의 원인이 될 서류 한 장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본다. 왕립 기숙학교 입학 허가서에는 교장이 직접 이름을 적었다. *러브웰 발렌타인 페이지*. 죽여주게 멋들어진 글씨로 그리 쓰여 있다.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졸업한 훌륭한 학교라는 명성에도 러브웰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10년 전부터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해서도 아니요, 몇 년 전부터는 평민의 입학까지 허가되어서도 아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입학 거부 성명서’라는 거창한 것까지 낸 치들과 한데 묶여 재수 없는 공작 영식 취급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부하고, 친분을 쌓고, 사교계에 진출하고, 사업을 하든 가문을 돌보든 일하는 모든 것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사교계는 작은형이, 사업과 가문은 소공작인 큰형과 그의 약혼자가, 연구는 누나가 이미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텐데 한 명 정도는 놀아도 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러브웰은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교문을 넘게 되자 반쯤 포기한 심정이 되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명문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모두가 건실하고 바르고 멋진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러브웰은 나름대로 학교생활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한다.

기숙 학교니까 기상 시간은 정해져 있을 게 틀림없다. 일어나 식당에서 입맛을 돋울 만한 가벼운 식사를 받으면 좋아하는 메뉴만 입에 넣고 나머지는 전부 남겨야지. 식사를 함께할 사람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아마 사교성이 좋거나 귀족 자제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다가올 거다. 애써 피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적당히 식당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책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기숙사에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어지럽다며 침대에 도로 누워 나오지 않는다. 놀거리가 없는 게 흠이지만 읽을 책은 몇 권 있다.

한창 빈틈없이 맞물리는 계획을 머릿속에 늘어놓던 러브웰이 눈을 질끈 감는다. 다 필요 없다. 전부 필요 없다. 지금이라도 갖가지 핑계를 대고 마차를 돌려 저택에 돌아간 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마부를 잘 설득하거나 구슬리거나 협박하거나 속이면 돌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까지 했지만, 마차는 이미 그를 고풍스러운 건물 앞에 행차하시게 한다는 임무를 완수한 후 저 멀리 떠났다. 마부의 수고에도 러브웰은 단 한 걸음조차 그쪽으로 옮기지 않고 방향을 돌린다. 교정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었다는 서른세 번째 변명거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후일 러브웰은 이 일을 후회해야 할지,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 고민한다. 왕자도 함부로 굴지 않는다던 명문 학교에서 두 명이나 배짱 좋게 입학식에 지각할 확률. 입학식에 작은 사고가 벌어져 아무도 지각한 학생을 찾지 않을 확률. 보수 중이라 쓰이지 않는 건물의 출입 금지 팻말이 바람에 떨어질 확률. 그리고……

“조심해!”

한적해 보이는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러브웰은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열린 문에 아슬아슬하게 부딪히지 않고 바닥에 쿵 내려앉는다. 작은 키, 풀어헤쳐 엉킨 금색 머리칼, 익숙한 생김새의 옷차림이 차례로 그의 눈에 들어온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를 코앞에 다가온다. 핏빛이라기엔 화사하고, 장밋빛이라기엔 쉴 새 없이 빛나고…… 그래, 딱 귓가에서 흔들리는 보석의 빛깔을 닮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더니, 피하는 건 잽싸구나? 고양이인 줄 알았어.”

“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명랑한 목소리가 말했듯, 러브웰은 그때만큼 잽싸게 몸을 놀린 적이 없었다. 다치면 어떤 번거로운 일이 벌어질지는 둘째치고, 아픈 걸 반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개를 들자 흙먼지가 조금 떨어지는 2층 가장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난간을 따라 시선을 훑으니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인 계단에 다다른다. 올라가는 건 어찌저찌 기어오를 수 있어 보이지만, 내려오는 건 만만찮을 터. 짧은 시간에 분석을 끝내고 도로 시선을 돌리자, 그 눈동자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내가?”

과장된 말투와 몸짓은 부모님 탓에 발치에 질질 끌리는 귀찮음까지 통째로 극장에 구겨 넣어 보았던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커리큘럼 따윈 제대로 읽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쩌면 배우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귀족 집안 자제들은 배우 수업을 듣지 않아도 평민의 입학을 허가했으니 뭔가 다를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다고 몇 년 새에 커리큘럼이 바뀔 리도 없건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가볍게 떠오른 생각을 흩어낸다.

“저기서 뛰어내렸으니까?”

“올라갈 땐 할 만했는데, 내려올 땐 아니어서 말이야.”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답변에 러브웰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표정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든 신경쓰지 않는 듯 불쑥 손이 다가온다. 악수를 기다리는 손에는 흙먼지가 옅게 묻어 있다. 

어쩐지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러브웰의 뒤통수를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분명 모든 학생은 입학식이 진행되는 곳에 모여야 하니, 같이 가자고 말하겠지. 귀찮은 일을 피하려 서른 가지 계책을 내도 계속해서 막히니, 더는 당해낼 수 없다.

러브웰은 가볍게 악수하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반항다운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본 것 같은데 이대로 끌려간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그 손에 쥐여주었다.

“자, 손수건. 손이나 좀 닦아.”

나머지 반항은 입학식 후에 하기로 굳게 결심한 러브웰은 자신을 찾고 있을 대강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함께한 아이가 길을 안내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앞장서 걷는다. 멀어질 땐 한없이 길고 긴 복도가 돌아올 때에는 왜 이렇게 짧은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러브웰의 손수건으로 손과 옷을 깔끔하게 닦고 얼결에 길 안내까지 받게 되어 따라온 아이는 강당으로 가는 길을 몰랐다.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땐 이미 강당 입구에 도착한 후였다. 같은 입장의 신입생이란 걸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러브웰은 아카데미 첫 날부터 이상한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입학식에 제때 도착할 생각도 없었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교정을 누비면서 입학식이 언제 시작하는지, 어디에서 진행되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적어도 어디에서 언제 진행하는지 알고 있던 자신이 더 낫지 않은가, 하며.

 

입학하기 싫다고 입학시험을 죄다 망쳐놓았더니, 교양으로 배운 음악에 소질이 있다며 가정교사가 진심 어린 추천장씩이나 써주었을 확률. 평민의 입학을 허락한 이래 한 명도 통과하지 못한 성가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소문의 여자아이가 입학식에 지각한 그 아이일 확률. 그래서 같은 학과에서 매일 같은 수업을 듣게 될 확률.

러브웰이 그런 시시한 숫자놀음을 할 때 스테이시아에게 그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어떻게 일기장에 적혔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 애에게선 소금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