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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30.

 

 

좋게 말해 여행자지, 무작정 떠도는 떠돌이 개와 다름이 없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는 허울 좋은 말은 이 세상 어디든 평생 떠돌라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견고한 강철성 안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자유를 원한 적이 없었다.

한때는 자신의 존재 의의였으며 가치이고 긍지였던 곳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사상누각. 그 말 그대로였다. 비록 기만 위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다 하더라도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었다. 내몰린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살기만 했다.

무너진 것은 성만이 아니었다. 주축부터 잘못된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테바. 성姓과 성城.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그 든든한 장벽이 있을 땐 놀이터나 다름없던 사막이었다. 이젠 이 광활한 사막이 너무나 두렵고, 자꾸만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단 생각에 빠졌다. 그 생각의 끝은 결국 해소되지 못할 향수와 서글픔 뿐인지라. 입안에서 텁텁하게 까끌거리는 모래를 뱉어내며 자꾸만 발목을 잡아채는 모래를 가르며 앞으로, 혹은 옆으로, 작열하는 태양을 등지고 제 그림자를 내려보며 걸어 나갔다.

 


 

사막을 헤매며 저와 같은 처지의 이그니스 들과 함께하기도 했고, 가끔은 어느 작은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저마다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은 달랐기에 한둘씩 흩어지고, 결국 떠났다. 헤어지는 갈림길도 각기 달랐다. 어느 이정표 앞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거나, 어느 마을 앞에서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간혹 어느 날엔 밤사이에 몇 없는 제 물건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으며 여정이 길어질수록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타고난 능력으로 목숨을 건사하는 것이야 몹시 어렵지 않았으나, 외톨이 신세에 누군가를 믿거나 의심하는 건 큰 피로가 따랐다.

홀로 지낸 시간을 따로 세려 하지 않았다. 세어도 허무하고 세지 않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서늘한 달. 저렇게 가득 찬 달을 두 번쯤 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었다. 모래에 먹히지 않은 건물을 찾아가며 무작정 걷고, 걷고. 목적지 없이 그저 망령처럼 사구를 넘나들었다.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자. 그렇게 생각하며 넘실대는 모래의 바다에서 무작정 헤엄쳤다.

 

그 위에 길게 난 발자국을 찾은 것은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갓 생긴 듯 푹푹 패인 발자국. 큰 것과 작은 홈. 기묘하게 생긴 세 개의 발자국이었다. 무른 흙이니 발자국이 남는 것은 당연했다. 특별치도 않은 발자국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그것은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지독한 모래바람 탓에 모래샤워를 하며 일어난 것을 기억한다.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다면 수년 뒤 미라로 발견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 발자국은 그 모래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자국을 굳혀놓은 듯 단단히 새겨져, 저 멀리 사구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사막에 지워지지 않는 발걸음이 뜨면, 그 끝엔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고.

허황한 희망을 심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그곳이라면 여기보단 ‘더 나은 곳’이겠지. 수 개월 만에 정해진 목적지에 걸음이 밭아졌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자국을 좇았다. 저를 갉아내는 것 같은 부연 모래바람을 맞으며 혹여나 한눈이라도 팔면 사라질까, 발자국을 따라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끊겼다. 그 끝엔 과거에는 간이 정류장으로 쓰였던 것 같은 직사각형 형태의 작은 건물이 서있었다. 겨우 모래바람이나 막을 정도로 허름한. 잠깐이나마 몸을 맡기고 쉴만한 만큼의 여유는 있었기에 지친 걸음으로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끔거리는 눈, 버석거리는 입 안,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온몸이 서걱거리는 듯했다. 투레질이라도 하듯 입에 들어온 모래를 뱉어내고 그 뒤엔 자연스레 앓는 소리가 샜다.

 

 

“어으으…”

 

“물, 필요하세요?”

 

“끼악!!”

 

 

다소 가느다란 비명이 작은 공간 안에 번쩍 울렸다. 허윽, 허, … 심장을 직접 어루만져 진정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심장께를 부여잡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비명을 삼켰다.

 

같은 사막을 헤맸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차림새에 곧은 자세로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사람은, 새하얀 가면을 검은 천으로 묶어 고정하고 있었다. 이 사막을 횡단하며 별의별 사람을 더 보았으니 면역은 있을 법도 하지만, 이렇게 기묘한 만남은 겪어본 적 없었다.

반응이 익숙한 듯 여전한 자세로 저를 바라보던 여인은-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그것마저도 불분명했다-작은 물병을 건넸다. 이런 곳에서 선의는 미덕이 아니라 미련인데. 그것을 받는 것도. 숨을 고르며 물병을 내려보고만 있자, 재촉하듯 건넨 물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이라도 헹구세요.”

 

 

재는 행동을 바라보던 기묘한 사람은 나직이 말했다. 상냥하지만 힘 있는 말씨. 외형은 수상하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물을 받아들어 입에 머금어 바로 입안을 헹구었다. 물에서 이상한 맛은 안 나는데. 이대로 삼키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한 구석에 물을 툽, 뱉어내고 입가를 훔쳤다. 고맙다 말하진 못해도 귀한 물을 벌컥벌컥 마셔댈 만큼의 뻔뻔함은 없는지라, 다시 한번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사의 표시를 하듯 고개를 꾸벅대고 병을 넘겨줬다. 아니, 그러려 했다.

부담스럽게. 제 일련의 행동을 그는 다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보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면이 제 쪽을 향해있으니 보지 않더라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병을 받아둘 생각을 하진 않고 물끄러미 보고 들고 선 손이 어색할 즈음 슬슬 짜증이 몰려와 입을 열었다.

 

“고…” “마셔요.”

 

뚝 끊고 들어온 단호한 말에 저도 모르게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친절한 건지 아닌지. 꿀꺽, 그 와중에도 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는 시원하게 조용한 공간에 시원하게 울렸다. 어쨌든 깨나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디단 물맛을 음미하다 황급히 물병을 입에서 뗐다.

 

“이, 런.”

 

눈을 굴리며 마개를 닫고 받을 적의 반도 남지 않은 물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뿐. 뭔가를 탔을 가능성은? 이걸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씨. 나직이 욕설을 씹으며 상대를 보았다. 관찰하듯 계속 자신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이젠 언제 봤냐는 듯 아무것도 없는 벽만 응시하고 있다. …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 이봐요.”

“목은 충분히 축였나요?”

 

 

저 사람이 제 할 말만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예. 잘 마셨습니다. 아니, 그. 좀 많이 마시긴 했는데. 반은 남았어요.”

 

툭, 그 옆에 병을 내려놓고 슥 밀어주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상한 여인은 다시 제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 행동에 기가 차 허, 하는 소리가 그대로 나왔다.

 

“뭘 원해요? 호의는 고마운데 난 치를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힘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죠?”

 

빼뚜름하게 나오는 말에 가면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아니에요.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줄 사람이 있던 거거든요.”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이럴 바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게 낫다. 줄 사람이 있는 물을 나한테 줘서 어쩌려고. 그러면서 받지도 않는단 말이 무슨 소리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물병을 쏘아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무도 만난 이가 없었다. 사방이 트여있으니 누군가 흔적이라도 보였다면 진작 보였을 텐데. 누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상대의 행색을 슥 훑어보았다. 손때 묻은 지팡이, 헐렁해 보이는 옷차림 아래로 보이는 얇은 손목. 알았다. 자신을 버리고 간 일행을 기다리고 있구나. 흔히 있는 일이다. 뒤처지고, 도태되어 결국 혼자 그 끝을 기다리는. 더 이상 누군가가 올 것 같지 않으니 자신에게 이걸 넘기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 걸지도. 머릿속에서 맞추어지는 퍼즐에 내심 우쭐해졌다. 다시 들려오는 세찬 모래바람 소리에 그것도 잠시였지만.

 

“여기 오기 전까지 사람이 있던 흔적이라곤 이 다 쓰러져가는 건물 하납디다. 그게 아마-... 100년쯤 전이려나. 이런 곳에서 누굴 기다려도 올 것 같진 않은데?”

 

그 말에 뭐가 웃기는지 여인은 다시 낮게 웃음을 흘렸다. 미친 건가? 상대는 흠, 하며 웃음을 거두고 생각을 갈무리하듯 음을 내더니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상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100년까진 아니지만, …”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진짜 미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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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3. 27.

메마른 사막 위를 걷는 세 개의 발자국이 있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푹푹 패여 있는 발자국은 기이하게도 거세게 부는 모래바람에도 쉬이 지워지지 않았고, 새겨진듯 제 찍힌 모양을 유지했다. 세 개의 점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선, 혹은 길. 그건 모래 장막 너머 어딘가로 여행자를 인도하는 듯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정체를 알리지 않는 인도자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면 이그니스들의 쉼터, 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사막의 낮은 여전히 익을 듯 뜨겁고 밤은 춥다. 단순히 보자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그저 광활한 사막이나, 십여 년 전의 사건 이후로 사막엔 큰 바람이 불었다.

 

테바는 붕괴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언처럼 남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연구원의 백신은 무사히 개발되었다. 이제 태양 아래 설 수 있는 것은 이그니스만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다시 무리를 짓는 이들도,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부여잡고 스러져가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담기에 사막은 넓었고, 이야기들은 모래에 묻혀갔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어느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고 살아남아 왔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는 살아갈 수 있으리라.

 

첼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논의 끝에 백신의 윤리적인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제 순탄히 제작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안정이 잡히자 첼의 수장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다음 이를 맞이했다.

 

새로운 수장의 추진 하에 구조 또한 세분되었다. 수용 인원은 더욱 늘어났고 그들의 삶의 질은 이전보다 더욱 나아졌다. 마을에 머물던 이들은 여전히 머물거나, 떠나거나 혹은 여행자가 되었지만 첼에 남았던 것이 쉬이 사라지진 않았다. 이름 모를 풀이 무성한 화단이나 오래 방치된 빈집, 쌓여가는 기록들, 그들 사이에 오가는 과거 이곳을 방문했던 이들의 반가운 이야기. 찰나의 생을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은 대다수의 사람이 그랬다.

 

십여 년 전 방문자들이 지었던 유리 온실은 더욱 커졌다. 그 안엔 이젠 보기 힘든 꽃들도 피워내고 있어, 간혹 먼 곳에서 온 학자들이 몇 날 며칠을 머물거나 아예 자리를 잡기도 했다.

 

첼은 더 이상 비이그니스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가장 처음으로 태양 아래 설 수 있었던, 제 키의 반쯤 오던 아이는 어느덧 자라 첼과 그들의 보금자리를 이어주는 인물이 됐다. 방문자를 선별하는 것도 승인하는 것도 그가 주축이 되어, 이젠 완벽한 협력자가 되었다.

 

한 번의 수용이 미래를 크게 뒤바꾸었다. 그것이 제 위선에서 시작된 일일지라도 우리에게, 인류에게 나름의 순기능이 됐다. 꿈꾼적 없던 현재가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첼과 비이그니스들과의 공존이 순탄하게 추진된 일은 아니었다. 수용을 반대하다 끝내 첼을 떠난 이들 또한 있었으며, 눈 역시 이 의견에 발의되었을 때 반대하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받아들인 건, 자신들의 권력적인 위치와 구역의 구분,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이라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반쯤 법이라 받아들였다-덕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리에서 내려온 이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도 그리 좋게 비추어지진 않을 것이었다.

 

그로부터 수 년,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은 바뀌고 있다. 태양과 모래에 좀먹어가던 땅은 점차 다른 색으로 뒤덮이고 있다. 이제 더는 태양 아래에 설 수 있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시대가 다가왔다.

 

그는 이제 자기 삶을 살기로 했다. 여전히 사막은 사람을 집어삼켰고, 그곳에서 어느 한 명이라도 더 건져내 바른길 위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소임이었다. 더 이상 묶인 몸이 아니었으니 어디든 갈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구심점엔 첼을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겠으나, 그는 가능한 것들 사이에서 가장 최고의 선택을 했으니 더없이 만족스럽단 말을 하며 가볍게 채운 가방을 등에 메고 모래 먼지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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