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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30.

 

 

좋게 말해 여행자지, 무작정 떠도는 떠돌이 개와 다름이 없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는 허울 좋은 말은 이 세상 어디든 평생 떠돌라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견고한 강철성 안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자유를 원한 적이 없었다.

한때는 자신의 존재 의의였으며 가치이고 긍지였던 곳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사상누각. 그 말 그대로였다. 비록 기만 위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다 하더라도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었다. 내몰린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살기만 했다.

무너진 것은 성만이 아니었다. 주축부터 잘못된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테바. 성姓과 성城.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그 든든한 장벽이 있을 땐 놀이터나 다름없던 사막이었다. 이젠 이 광활한 사막이 너무나 두렵고, 자꾸만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단 생각에 빠졌다. 그 생각의 끝은 결국 해소되지 못할 향수와 서글픔 뿐인지라. 입안에서 텁텁하게 까끌거리는 모래를 뱉어내며 자꾸만 발목을 잡아채는 모래를 가르며 앞으로, 혹은 옆으로, 작열하는 태양을 등지고 제 그림자를 내려보며 걸어 나갔다.

 


 

사막을 헤매며 저와 같은 처지의 이그니스 들과 함께하기도 했고, 가끔은 어느 작은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저마다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은 달랐기에 한둘씩 흩어지고, 결국 떠났다. 헤어지는 갈림길도 각기 달랐다. 어느 이정표 앞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거나, 어느 마을 앞에서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간혹 어느 날엔 밤사이에 몇 없는 제 물건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으며 여정이 길어질수록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타고난 능력으로 목숨을 건사하는 것이야 몹시 어렵지 않았으나, 외톨이 신세에 누군가를 믿거나 의심하는 건 큰 피로가 따랐다.

홀로 지낸 시간을 따로 세려 하지 않았다. 세어도 허무하고 세지 않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서늘한 달. 저렇게 가득 찬 달을 두 번쯤 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었다. 모래에 먹히지 않은 건물을 찾아가며 무작정 걷고, 걷고. 목적지 없이 그저 망령처럼 사구를 넘나들었다.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자. 그렇게 생각하며 넘실대는 모래의 바다에서 무작정 헤엄쳤다.

 

그 위에 길게 난 발자국을 찾은 것은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갓 생긴 듯 푹푹 패인 발자국. 큰 것과 작은 홈. 기묘하게 생긴 세 개의 발자국이었다. 무른 흙이니 발자국이 남는 것은 당연했다. 특별치도 않은 발자국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그것은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지독한 모래바람 탓에 모래샤워를 하며 일어난 것을 기억한다.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다면 수년 뒤 미라로 발견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 발자국은 그 모래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자국을 굳혀놓은 듯 단단히 새겨져, 저 멀리 사구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사막에 지워지지 않는 발걸음이 뜨면, 그 끝엔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고.

허황한 희망을 심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그곳이라면 여기보단 ‘더 나은 곳’이겠지. 수 개월 만에 정해진 목적지에 걸음이 밭아졌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자국을 좇았다. 저를 갉아내는 것 같은 부연 모래바람을 맞으며 혹여나 한눈이라도 팔면 사라질까, 발자국을 따라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끊겼다. 그 끝엔 과거에는 간이 정류장으로 쓰였던 것 같은 직사각형 형태의 작은 건물이 서있었다. 겨우 모래바람이나 막을 정도로 허름한. 잠깐이나마 몸을 맡기고 쉴만한 만큼의 여유는 있었기에 지친 걸음으로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끔거리는 눈, 버석거리는 입 안,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온몸이 서걱거리는 듯했다. 투레질이라도 하듯 입에 들어온 모래를 뱉어내고 그 뒤엔 자연스레 앓는 소리가 샜다.

 

 

“어으으…”

 

“물, 필요하세요?”

 

“끼악!!”

 

 

다소 가느다란 비명이 작은 공간 안에 번쩍 울렸다. 허윽, 허, … 심장을 직접 어루만져 진정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심장께를 부여잡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비명을 삼켰다.

 

같은 사막을 헤맸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차림새에 곧은 자세로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사람은, 새하얀 가면을 검은 천으로 묶어 고정하고 있었다. 이 사막을 횡단하며 별의별 사람을 더 보았으니 면역은 있을 법도 하지만, 이렇게 기묘한 만남은 겪어본 적 없었다.

반응이 익숙한 듯 여전한 자세로 저를 바라보던 여인은-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그것마저도 불분명했다-작은 물병을 건넸다. 이런 곳에서 선의는 미덕이 아니라 미련인데. 그것을 받는 것도. 숨을 고르며 물병을 내려보고만 있자, 재촉하듯 건넨 물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이라도 헹구세요.”

 

 

재는 행동을 바라보던 기묘한 사람은 나직이 말했다. 상냥하지만 힘 있는 말씨. 외형은 수상하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물을 받아들어 입에 머금어 바로 입안을 헹구었다. 물에서 이상한 맛은 안 나는데. 이대로 삼키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국 한 구석에 물을 툽, 뱉어내고 입가를 훔쳤다. 고맙다 말하진 못해도 귀한 물을 벌컥벌컥 마셔댈 만큼의 뻔뻔함은 없는지라, 다시 한번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사의 표시를 하듯 고개를 꾸벅대고 병을 넘겨줬다. 아니, 그러려 했다.

부담스럽게. 제 일련의 행동을 그는 다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보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면이 제 쪽을 향해있으니 보지 않더라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병을 받아둘 생각을 하진 않고 물끄러미 보고 들고 선 손이 어색할 즈음 슬슬 짜증이 몰려와 입을 열었다.

 

“고…” “마셔요.”

 

뚝 끊고 들어온 단호한 말에 저도 모르게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친절한 건지 아닌지. 꿀꺽, 그 와중에도 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는 시원하게 조용한 공간에 시원하게 울렸다. 어쨌든 깨나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디단 물맛을 음미하다 황급히 물병을 입에서 뗐다.

 

“이, 런.”

 

눈을 굴리며 마개를 닫고 받을 적의 반도 남지 않은 물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뿐. 뭔가를 탔을 가능성은? 이걸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씨. 나직이 욕설을 씹으며 상대를 보았다. 관찰하듯 계속 자신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이젠 언제 봤냐는 듯 아무것도 없는 벽만 응시하고 있다. …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 이봐요.”

“목은 충분히 축였나요?”

 

 

저 사람이 제 할 말만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예. 잘 마셨습니다. 아니, 그. 좀 많이 마시긴 했는데. 반은 남았어요.”

 

툭, 그 옆에 병을 내려놓고 슥 밀어주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상한 여인은 다시 제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 행동에 기가 차 허, 하는 소리가 그대로 나왔다.

 

“뭘 원해요? 호의는 고마운데 난 치를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힘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죠?”

 

빼뚜름하게 나오는 말에 가면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아니에요.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줄 사람이 있던 거거든요.”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이럴 바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게 낫다. 줄 사람이 있는 물을 나한테 줘서 어쩌려고. 그러면서 받지도 않는단 말이 무슨 소리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물병을 쏘아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무도 만난 이가 없었다. 사방이 트여있으니 누군가 흔적이라도 보였다면 진작 보였을 텐데. 누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상대의 행색을 슥 훑어보았다. 손때 묻은 지팡이, 헐렁해 보이는 옷차림 아래로 보이는 얇은 손목. 알았다. 자신을 버리고 간 일행을 기다리고 있구나. 흔히 있는 일이다. 뒤처지고, 도태되어 결국 혼자 그 끝을 기다리는. 더 이상 누군가가 올 것 같지 않으니 자신에게 이걸 넘기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 걸지도. 머릿속에서 맞추어지는 퍼즐에 내심 우쭐해졌다. 다시 들려오는 세찬 모래바람 소리에 그것도 잠시였지만.

 

“여기 오기 전까지 사람이 있던 흔적이라곤 이 다 쓰러져가는 건물 하납디다. 그게 아마-... 100년쯤 전이려나. 이런 곳에서 누굴 기다려도 올 것 같진 않은데?”

 

그 말에 뭐가 웃기는지 여인은 다시 낮게 웃음을 흘렸다. 미친 건가? 상대는 흠, 하며 웃음을 거두고 생각을 갈무리하듯 음을 내더니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상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100년까진 아니지만, …”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진짜 미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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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2022. 6. 19.매복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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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전자오락수호대 완결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모르시면 안 읽어도 돼요~

하지만 이건 안 읽어도 전자오락수호대는 봐주세요 사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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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떼었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기껏 대접해준 것을 입에 가져가지도 않은 채 손깍지를 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인가.”

아니카 역시 차려두기만 한 잔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긴 마찬가지였다. 크레인의 개별 만남 요청을 수락하며 대화를 간단하게 끝내고 싶어 집으로 초대한 입장이었지만, 그리 달갑진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귀한 분이 뭐 하러 이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방해하신대요?”

그 말대로 바깥에선 마을 복구 사업이 한창이었다. 약초밭이 엉망이 되었다느니, 상점 건물은 처음부터 새로 지어야겠다느니 하는 대화 속에서는 전과 달리 수호대 직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오랫동안 고전게임부서를 등한시했던 수호대가 하루아침에 이들과 함께하려니 제법 웃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수호대의 모든 이념과 직원 개개인의 것이 완전히 같지는 않는 법. 반면에 크레인은 복구를 도와주긴커녕 방해하러 온 게 맞는 셈이라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잔 속의 녹지 않는 얼음만 달그락거렸다.

“원하는 대로 짧게 말하지. 자네를 수호대 신설 부서에 스카우트하고 싶네.”

“어머~ 이거 낙하산 아닌가?”

차별 없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공개된 인사로 유명한 크레인의 제안에 놀랄 법도 했지만, 아니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전설’로 다시 자리매김한 용검전설의 NPC라고 해도 크레인이 직접 찾아올 이유는 몇 가지로밖에 좁혀지지 않는다. 설마 하긴 했어도 조금은 예상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크레인은 대답 대신 가져온 서류를 펼쳤다. 이전에 패치와 치트가 각자 고전게임부서와 용검전설에 대해 올린 보고서였다. 치트가 작성한 서류에는 검은 칠이 많아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크레인은 이제 극비 문서로 넘어가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검은 금요일’ 이후 촌장과, 아버지와, 많은 것들을 잃은 약초마을의 새 촌장이 어떻게 용검전설과 약초마을을 지켜냈는지는 읽을 수 있었다.

“자네는 ‘검은 금요일’ 이전에는 정식 대원이 될 예정이었지. 당시 해직된 이들을 복귀시키는 건 당연한 수순일세.”

아니카는 해직된 대원이 아니라 자진 퇴사였지만 크레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 절차상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인사팀장이 모든 이에게 직접 찾아올 리도 없었다. 아니카가 입을 떼기도 전에 크레인은 다른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를 뒤덮었다.

“신설 부서의 초안이네. 공개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왔지. 이제 주인공님들은 ‘리얼함’을 원하네. 시뮬레이션과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달라.”

서류에는 ‘레일 월드’, ‘씽즈’, ‘에일리언 숨바꼭질’ 등 수호대가 복구 사업이 정리되면 오픈하겠다고 발표한 게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인공님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된 완벽한 게임이 아닌, 주인공님과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세계. 자유로운 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예측 불허의 게임. 주인공님들은 이제 이런 게임을 원한다고 했다. 신설 부서의 이름 후보에는 ‘신 시뮬레이션 부서’, ‘리얼 월드 부서’, 그리고…… ‘인공지능 부서’.

“여기서 있던 일은 함구할게요.”

아니카는 팔랑팔랑 넘기던 서류를 테이블에 탁탁 내리쳐 정리했다. 수호대에 합격했던 아니카는 분명히 이 제안을 수락했을 것이다. 자신이 잘하고 즐길 수 있는 분야일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검은 하늘 아래에서 소꿉친구에게 등을 돌린 채 눈물 흘리던 소녀는 그 시절에 남겨두고 왔다. 힘만 센 바보에게 약속해달라 다그치던 아이는 새로운 촌장을 배웅했다.

“그리고~ 제가 약초마을 촌장 짬밥이 있는데 어지간한 직위는 사절이거든요. 신설 부서 팀장이면 승낙할게요?”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당돌한 제안에 크레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카라면 대리부터 시작할 수 있고, 틀림없이 패치와 비슷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고속 승진 기록을 세울 만한 인재다. 그러나 아니카가 요구한 조건은 크레인의 선을 넘는 일이었다.

“비밀을 지켜 준다니 고맙군. 그럼 그만 방해하고 이만 가보도록 하지. 실례 많았네.”

두 사람은 처음 대면했지만, 서로를 잘 알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있더라도 본인의 의사가 확고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카의 단호한 거절에 크레인은 미련 갖지 않고 일어섰다.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찻잔을 앞에 두고 차를 잘 마셨다는 인사도 덧붙였다.

아니카는 불청객을 현관까지만 배웅하고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뒤늦게 식은 차를 들이켜며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약초마을은 여전히 약초마을이었다. 수호대에 합격하고 발령 결과에 따라 떠날 수도 있던 곳이었다. 그래도 큰 유감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젠 용검전설이, 마을 주민들이, 퍼블리가, 그리고 아니카 자신이 아니카를 이곳에 있게 했다.

“더 바빠지겠네~”

혼잣말을 하는 아니카의 머릿속에선 많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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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월드나 심즈같이 알아서 굴러가는 세계관 게임을 좋아해서 ^///^)> 아니카가 찰딱일 것 같았어요!

크레인이 수락할 리 없는 제안으로 돌려서 거절하는 아니카와 거절 의사를 한방에 알아듣는 크레인이 보고 싶었습니다.

체인소맨 덴지×레제

2022. 5. 17.매복사랑니

체인소맨 1부(단행본 ~11권) 스포일러가 있어서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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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운다.

더럽게 시끄럽게 운다.

“아~ 시끄러워!”

한가롭게 그늘에서 잠을 청하던 덴지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손에 집히는 걸 집어던져도 나뭇잎 뒤에 숨은 매미에게 맞지도 않을뿐더러 매미 울음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대신 가볍고 밝은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하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꺄르르 웃는다. 손끝을 스치는 머리카락이 산뜻한 바람에 흔들린다. 여름의 더위에 살짝 상기된 볼을 식히려 손등을 가져다 댄다. 살면서 덴지를 그렇게 바라본 이가 없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여름방학인데 잠만 잘 거야?”

“보통은 방학에 뭘 하는데?”

덴지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여름방학도 겪어본 적 없었다. 덴지가 하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싸우는 것뿐이었다. 교복도 입어본 적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학교엔 몇 시에 가는지, 개학은 며칠에 하는지, 가방엔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덴지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기만 했다. 레제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제의 종아리까지만 뜨거운 햇빛이 비쳤다. 여전히 매미는 시끄럽게 운다.

덴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단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이 손만 잡으면 덴지가 겪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한발씩 내딛게 된다는 것을.

 

덴지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눈을 번쩍 떴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낮이다. 덴지는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채 흐트러진 이불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할 일도 없어서 낮잠이나 자던 차였다.

꿈을 꾼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덴지, 이 바보바보바보! 이 몸이 심심한데 잠만 자는 게냐!”

입안이 다 보이게 하품을 하던 차에 덴지는 파워의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날아오는 베개를 피하듯 몸을 젖히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방에, 누군가 열어주는 일 없는 문만 보였다.

덴지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기만 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아무 표시도 되어있지 않았다. 표시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다음 주에는 가을 학기가 시작된다.

 

덴지는 여름방학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주는 일요일까지 쭉 바빠서 좀 빠르게 올려요

▼얘도 체인소맨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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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11권에 학교에 가버리더라고요 덴지가……

이래서 날조창작은 민첩하게 해야하는데

 

은하의 바다 01

2022. 5. 4.매복사랑니

한차례 학생의 물결이 쓸고 지나간 커다란 문 앞에 마차가 멈추어 선다. 문지기는 입학식이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고풍스러운 창살 문을 닫던 참이다. 하지만 시간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문지기는 마차의 문장을 확인한 뒤, 어떤 번거로운 절차도 없이 문을 도로 활짝 연다. 잠시 뜸해진 말발굽 소리가 다시 일정한 속도로 울린다.

“뭐야, 그냥 열어주네…….”

검은 머리카락으로 눈가를 살짝 가린 소년이 마차 안에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문지기가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라며 막아서길 바란 모양이다. 늦잠 자는 척을 하고, 두고 온 짐이 있다며 저택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오고, 멀미한다며 말을 느리게 몰아달라고 했지만, 완벽히 소용없었다. 입학생 대표가 아니니 입학식에 늦게 입장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 기숙사 확인을 늦게 해도 크게 꾸중 듣진 않을 게 뻔하다. 소년은 그 모든 특혜의 원인이 될 서류 한 장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본다. 왕립 기숙학교 입학 허가서에는 교장이 직접 이름을 적었다. *러브웰 발렌타인 페이지*. 죽여주게 멋들어진 글씨로 그리 쓰여 있다.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졸업한 훌륭한 학교라는 명성에도 러브웰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10년 전부터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해서도 아니요, 몇 년 전부터는 평민의 입학까지 허가되어서도 아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입학 거부 성명서’라는 거창한 것까지 낸 치들과 한데 묶여 재수 없는 공작 영식 취급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부하고, 친분을 쌓고, 사교계에 진출하고, 사업을 하든 가문을 돌보든 일하는 모든 것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사교계는 작은형이, 사업과 가문은 소공작인 큰형과 그의 약혼자가, 연구는 누나가 이미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텐데 한 명 정도는 놀아도 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러브웰은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교문을 넘게 되자 반쯤 포기한 심정이 되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명문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모두가 건실하고 바르고 멋진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러브웰은 나름대로 학교생활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한다.

기숙 학교니까 기상 시간은 정해져 있을 게 틀림없다. 일어나 식당에서 입맛을 돋울 만한 가벼운 식사를 받으면 좋아하는 메뉴만 입에 넣고 나머지는 전부 남겨야지. 식사를 함께할 사람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아마 사교성이 좋거나 귀족 자제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다가올 거다. 애써 피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적당히 식당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책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기숙사에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어지럽다며 침대에 도로 누워 나오지 않는다. 놀거리가 없는 게 흠이지만 읽을 책은 몇 권 있다.

한창 빈틈없이 맞물리는 계획을 머릿속에 늘어놓던 러브웰이 눈을 질끈 감는다. 다 필요 없다. 전부 필요 없다. 지금이라도 갖가지 핑계를 대고 마차를 돌려 저택에 돌아간 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마부를 잘 설득하거나 구슬리거나 협박하거나 속이면 돌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까지 했지만, 마차는 이미 그를 고풍스러운 건물 앞에 행차하시게 한다는 임무를 완수한 후 저 멀리 떠났다. 마부의 수고에도 러브웰은 단 한 걸음조차 그쪽으로 옮기지 않고 방향을 돌린다. 교정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었다는 서른세 번째 변명거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후일 러브웰은 이 일을 후회해야 할지,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 고민한다. 왕자도 함부로 굴지 않는다던 명문 학교에서 두 명이나 배짱 좋게 입학식에 지각할 확률. 입학식에 작은 사고가 벌어져 아무도 지각한 학생을 찾지 않을 확률. 보수 중이라 쓰이지 않는 건물의 출입 금지 팻말이 바람에 떨어질 확률. 그리고……

“조심해!”

한적해 보이는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러브웰은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열린 문에 아슬아슬하게 부딪히지 않고 바닥에 쿵 내려앉는다. 작은 키, 풀어헤쳐 엉킨 금색 머리칼, 익숙한 생김새의 옷차림이 차례로 그의 눈에 들어온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를 코앞에 다가온다. 핏빛이라기엔 화사하고, 장밋빛이라기엔 쉴 새 없이 빛나고…… 그래, 딱 귓가에서 흔들리는 보석의 빛깔을 닮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더니, 피하는 건 잽싸구나? 고양이인 줄 알았어.”

“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명랑한 목소리가 말했듯, 러브웰은 그때만큼 잽싸게 몸을 놀린 적이 없었다. 다치면 어떤 번거로운 일이 벌어질지는 둘째치고, 아픈 걸 반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개를 들자 흙먼지가 조금 떨어지는 2층 가장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난간을 따라 시선을 훑으니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인 계단에 다다른다. 올라가는 건 어찌저찌 기어오를 수 있어 보이지만, 내려오는 건 만만찮을 터. 짧은 시간에 분석을 끝내고 도로 시선을 돌리자, 그 눈동자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내가?”

과장된 말투와 몸짓은 부모님 탓에 발치에 질질 끌리는 귀찮음까지 통째로 극장에 구겨 넣어 보았던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커리큘럼 따윈 제대로 읽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쩌면 배우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귀족 집안 자제들은 배우 수업을 듣지 않아도 평민의 입학을 허가했으니 뭔가 다를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다고 몇 년 새에 커리큘럼이 바뀔 리도 없건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가볍게 떠오른 생각을 흩어낸다.

“저기서 뛰어내렸으니까?”

“올라갈 땐 할 만했는데, 내려올 땐 아니어서 말이야.”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답변에 러브웰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표정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든 신경쓰지 않는 듯 불쑥 손이 다가온다. 악수를 기다리는 손에는 흙먼지가 옅게 묻어 있다. 

어쩐지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러브웰의 뒤통수를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분명 모든 학생은 입학식이 진행되는 곳에 모여야 하니, 같이 가자고 말하겠지. 귀찮은 일을 피하려 서른 가지 계책을 내도 계속해서 막히니, 더는 당해낼 수 없다.

러브웰은 가볍게 악수하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반항다운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본 것 같은데 이대로 끌려간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그 손에 쥐여주었다.

“자, 손수건. 손이나 좀 닦아.”

나머지 반항은 입학식 후에 하기로 굳게 결심한 러브웰은 자신을 찾고 있을 대강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함께한 아이가 길을 안내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앞장서 걷는다. 멀어질 땐 한없이 길고 긴 복도가 돌아올 때에는 왜 이렇게 짧은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러브웰의 손수건으로 손과 옷을 깔끔하게 닦고 얼결에 길 안내까지 받게 되어 따라온 아이는 강당으로 가는 길을 몰랐다.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땐 이미 강당 입구에 도착한 후였다. 같은 입장의 신입생이란 걸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러브웰은 아카데미 첫 날부터 이상한 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입학식에 제때 도착할 생각도 없었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교정을 누비면서 입학식이 언제 시작하는지, 어디에서 진행되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적어도 어디에서 언제 진행하는지 알고 있던 자신이 더 낫지 않은가, 하며.

 

입학하기 싫다고 입학시험을 죄다 망쳐놓았더니, 교양으로 배운 음악에 소질이 있다며 가정교사가 진심 어린 추천장씩이나 써주었을 확률. 평민의 입학을 허락한 이래 한 명도 통과하지 못한 성가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소문의 여자아이가 입학식에 지각한 그 아이일 확률. 그래서 같은 학과에서 매일 같은 수업을 듣게 될 확률.

러브웰이 그런 시시한 숫자놀음을 할 때 스테이시아에게 그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어떻게 일기장에 적혔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 애에게선 소금 냄새가 났다.